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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과 부활, 시대를 초월한 예술가의 초상: 윌리엄 부그로의 삶과 예술

티스토리블로그1220 2025. 8. 23.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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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거장의 부활, 시대를 관통하는 예술혼

누가 봐도 너무 잘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피부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사실적이고, 표면은 매끈합니다. 19세기 프랑스 화가 윌리엄 아돌프 부그로(1825~1905)의 걸작이자 오늘날 미국 클라크 미술관의 간판 작품, ‘님프와 사티로스’(1873)입니다. 이 그림은 완성되자마자 지금 돈으로 수십억 원(당시 3만5000프랑, 1인당 GDP 기준 환산)에 팔려나갔습니다. 9년 뒤 경매에 나온 이 작품은 40%나 오른 값에 낙찰됐습니다. 새 주인은 이 작품을 자신이 소유한 뉴욕의 최고급 호텔(호프만 하우스)에 걸었습니다. 덕분에 그림은 20여년간 수많은 거물들의 머리 위에서 그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한 시대를 상징하는 걸작이었던 이 그림은 어느샌가 대중의 눈앞에서 자취를 감췄습니다. “너무 야하고 촌스럽다”는 비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이 작품은 40여년간 창고에 처박혀 있어야 했습니다. 명작은 언제 어디서나 명작이고, 그 가치는 시간이 흘러도 영원히 변치 않는다고들 생각합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 시대의 걸작은 다음 시대의 졸작이 되기도 합니다. 반대로 시간이 흐르면서 위대한 유산으로 취급받기도 하지요.

 

 

 

 

99등에서 1등으로, 부그로의 치열했던 예술 인생

부그로는 1825년 프랑스 서부의 항구도시 라로셸에서 태어났습니다. 상인이었던 아버지는 엄격하고 현실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화가는 아무나 하는 줄 알아? 넌 평범한 사람이야. 가업을 잇거라.” 아버지는 부그로를 자기 사무실에서 일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부그로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새벽에 일어나 출근 전 미술학교 수업을 들었고, 퇴근 후에는 초상화와 음식 포장지에 들어갈 그림 등을 그려 돈을 모았습니다. 마침내 스물한살이 되던 1846년, 부그로는 스스로의 힘으로 꿈에 그리던 파리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곧바로 부그로는 프랑스 최고 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결과는 합격.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합격자 명단에 적힌 100명 중 부그로의 이름은 아흔아홉 번째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광스러운 시작은 결코 아니었지요. 당대 최고의 재능들이 모여들던 치열한 파리 미술계에서, 이 정도의 애매한 실력으로는 살아남기조차 쉽지 않은 게 현실이었으니까요. 부그로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출발이 늦었으니 더 열심히 해야 해.’ 동료들이 파리 시내에서 젊음의 낭만을 즐길 때도 부그로는 강의실과 작업실만 오갔습니다. 정규 수업은 물론 해부학 실습, 고고학 수업 등에도 참여하며 닥치는 대로 공부하고 자신을 단련했습니다. 이 시기 부그로의 일기에는 자신을 다잡는 고독한 노력의 흔적이 가득합니다. “나는 외롭다.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고 싶지만, 힘들다... 하지만 내게 허락된 건 오직 그림뿐이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 피어난 예술혼

그에게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모든 젊은 화가들이 꿈꾸던 로마상(Prix de Rome)을 타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에콜 데 보자르에서는 매년 작품 경진대회를 열고 각 분야에서 1등상을 받은 학생을 로마로 유학보내 줬습니다. 로마상을 받는다는 건 고대의 걸작들을 직접 보며 실력을 키울 절호의 기회이자, 당대 최고의 재능으로 공식 인정을 받는 영예였습니다. 부그로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처절한 경쟁에 뛰어들었습니다. 로마상에 이르는 길은 멀고도 험했습니다. 그는 연달아 탈락의 쓴잔을 마셨습니다. 깊은 좌절 속에서 그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내가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오만한 생각이었어. 내 작품 꼴을 봐. 잔인할 정도로 수준이 낮다.” 하지만 그 좌절의 시간은 그의 몸에 탄탄한 기본기를 새겨줬습니다. 피나는 노력을 통해 부그로는 그동안 프랑스 미술의 선배들이 쌓아온 정수를 배우고 그 아름다움에 깊이 공감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1850년, 마침내 세 번째 도전 만에 그는 로마상을 수상해 유학길에 오릅니다.

 

 

 

 

영광과 좌절, 그리고 부활

30세이던 1855년, 부그로가 만국박람회에 출품한 ‘순교자의 승리’는 엄청난 찬사를 끌어모았습니다. 99등으로 시작했던 청년은 이제 1등으로 주목받는 작가가 되었습니다. 황제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앞다퉈 부그로에게 작품을 의뢰했습니다. 작품을 어떻게든 갖고 싶어서, 무슨 그림인지 보기도 전에 “부그로의 신작이면 무조건 사겠다”며 돈부터 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부그로는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도 받으며 그는 프랑스 미술의 대표 작가로 공인받았습니다. 결혼해 아이들도 생겼습니다. 두 손으로 성실하게 일궈낸 성공 신화. 그의 삶은 완벽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영광의 정점에 선 부그로의 삶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웁니다. 시작은 1872년 갓 태어난 넷째딸이 세상을 떠난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3년 뒤, 열여섯 살의 장남이 결핵으로 숨을 거두고 맙니다. 부그로의 마음은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을 담은 걸작 ‘피에타’(1876)를 그립니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1877년 4월 아내가 다섯째 아이를 낳은 뒤 시름시름 앓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달 뒤 아이마저 어머니의 뒤를 따랐습니다.

 

 

 

 

시대의 변화와 예술가의 고뇌

개인적인 슬픔과 별개로, 프랑스 미술의 최고 권위자였던 부그로의 영향력은 굳건했습니다. 부그로는 자신이 졸업한 에콜 데 보자르의 교수이자 사설 학교인 아카데미 줄리앙의 교수로 재직하며 수많은 화가를 길러냈습니다. 하지만 미술계 한편에서는 뭔가 수상한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지요. 그 움직임의 이름은 인상주의였습니다. 1863년 마네가 발표한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새로운 시대의 서막이었습니다. 부그로는 이 새로운 녀석들의 그림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인상주의 작품들을 “수준 이하의 그림”, “푸르스름한 그림자”라고 불렀지요. 세상에는 영원히 변치 않는 아름다움과 진실이 존재하고, 예술가는 이를 ‘완벽하게 잘 그리기 위해’ 평생 단련해야 한다는 게 부그로의 신념이었습니다. 부그로는 그런 사기를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갈등은 격화됐습니다. 부그로는 인상주의를 “밑그림에 불과하다”고 비판했습니다. 반면 드가와 고갱 같은 화가들은 부그로의 비현실적으로 매끈한 화풍을 조롱하며 ‘부그로스럽다’(Bouguereaute)는 신조어를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고전 예술의 ‘익숙한 완벽함’에 질려가고, 급변하는 시대의 공기를 담아낸 인상주의에 점점 더 매혹됐습니다. 인상주의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부그로의 작품은 생명력을 잃고 박제된 골동품에 불과했습니다.

 

 

 

 

영원한 가치, 부그로의 예술은 다시 빛을 발하다

20세기 중후반 들어 부그로의 그림은 다시 사람들의 인정을 받게 됩니다. 추상적이고 말장난처럼 느껴지는 현대미술에 대한 피로감이 쌓이고, 그림 실력과 노력을 높이 사는 사람들이 다시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유행은 돌고 도는 법. 마침내 부그로는 대중 앞으로 불려 나와 다시 사랑받게 됐습니다. 40년간 창고에 처박혔던 ‘님프와 사티로스’가 미술관의 대표 소장품으로 화려하게 부활한 게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건 그의 작품이 ‘진짜’였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는 시대가 되면서 사실적인 그림의 수요는 거의 사라졌습니다. 부그로가 살아있을 때 중요했던 것들은 역사 속으로 거의 사라졌습니다. 여전히 인상주의 작품의 가격은 부그로 작품보다 훨씬 비쌉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아름답고, 수많은 관객을 클라크미술관으로 끌어모아 감동을 줍니다. 이는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쌓아 올린 실력 덕분입니다. 이렇듯 정말로 중요한 것들은 오랫동안 살아남습니다. 요즘 저는 AI의 눈부신 발전을 보면서, 앞으로 닥쳐올 새로운 시대에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 고민하곤 합니다.

 

 

 

 

부그로, 시대를 넘어선 예술혼의 불멸

윌리엄 부그로는 시대를 앞서간 예술가이자,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예술혼을 불태운 인물입니다. 그의 삶은 영광과 좌절, 그리고 부활을 거듭하며, 예술의 본질과 시대의 변화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시합니다. 부그로의 작품은 단순한 그림을 넘어, 인간의 삶과 감정을 담아내며 시대를 초월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부그로의 작품이 한때 외면받았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A.인상주의의 등장과 시대적 변화로 인해, 부그로의 사실적인 화풍이 낡고 고리타분하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Q.부그로의 예술이 오늘날 다시 재평가받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A.현대 미술에 대한 피로감과 그림 실력에 대한 재인식, 그리고 유행의 변화로 인해 부그로의 작품이 다시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Q.부그로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하게 봐야 할 점은 무엇인가요?

A.그의 작품은 아름다움, 인간의 감정, 그리고 시대를 초월하는 가치를 담고 있으며, 이는 그의 혼신의 노력과 예술혼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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